강의록 · 원어 도구

왜 문법이 신학을 가르는가

히브리어를 배우면 무엇이 달라지는지에 대한 글입니다. 문법 지식을 쌓는 이야기가 아니라, 결론이 갈리는 자리가 어디인지 알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히브리어를 한 글자도 모르셔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 나오는 히브리어에는 읽는 소리와 뜻을 모두 붙였습니다.

0번역본이 서로 다르다는 것

성경 번역본을 여러 개 펴 놓고 같은 절을 비교해 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말이 다릅니다. 어떤 번역은 창세기 첫 절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하고, 어떤 번역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기 시작하셨을 때”로 시작합니다.

둘 중 하나가 실수한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첫 낱말 하나가 두 가지로 읽히고, 번역자가 그중 하나를 골라 적은 것입니다.

이 글은 그런 자리가 창세기 앞부분에 몇 개나 있는지, 그리고 그 자리들이 왜 신학 논쟁으로 이어지는지를 다섯 개의 사례로 보여 줍니다.

색으로 갈래를 표시했습니다. 이 도구의 다른 화면과 같은 색입니다.

초록 — 첫 번째 읽기  ·  주황 — 두 번째 읽기  ·  금색 — 우리가 직접 센 것

이 글은 어느 읽기가 옳은지 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건 이 글의 일이 아닙니다.

1첫 낱말 하나 — 창세기 1:1

창세기 1:1 · 첫 낱말
בְּרֵאשִׁית 베레쉬트 처음에 · ~의 처음에
בְּ베~에, ~안에 (앞에 붙는 조각)
רֵאשִׁית레쉬트시작, 처음, 첫머리, 첫 열매

여기까지는 갈리지 않습니다. 갈리는 것은 히브리어 명사가 두 가지 상태를 가진다는 데서 옵니다.

상태성격이 자리에 넣으면
절대상태그 자체로 완결된 명사“처음에” — 문장이 여기서 완결됩니다
구속상태뒤에 오는 말에 매인 명사“~의 처음에” — 뒤 문장에 매입니다

רֵאשִׁית (레쉬트)는 형태가 양쪽으로 다 읽힙니다. 그래서 문장 전체의 구조가 갈립니다.

두 가지 읽기
절대상태로 읽으면
1:1 처음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1:2 그리고 땅은 형태가 없었고…
구속상태로 읽으면
1:1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기 시작하셨을 때,
1:2 땅이 형태가 없었고…
1:3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빛이 있으라.

주황으로 읽으면 첫 문장이 1:3에 가서야 끝납니다. 창조 이야기의 첫 사건이 “창조하셨다”에서 “빛이 있으라”로 옮겨 갑니다.

각 읽기의 근거

절대상태 쪽구속상태 쪽
마소라 본문의 모음 점이 절대상태로 찍혀 있습니다

칠십인역이 독립문으로 옮겼습니다

뒤에 오는 것이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 구속상태로 보기에 드문 꼴입니다
רֵאשִׁית (레쉬트)는 대부분 뒤에 다른 낱말을 달고 나옵니다 — 아래 수를 보십시오

1:2가 문법적으로 배경절 꼴입니다 (2장에서 봅니다)

중세 유대 주석가 라쉬가 이미 이렇게 읽었습니다
우리가 센 수

모세오경(창–신)에 רֵאשִׁית (레쉬트)가 18회 나옵니다.
구속상태 15회 · 절대상태 3회 — 창세기 1:1 · 레위기 2:12 · 신명기 33:21

구속상태가 훨씬 많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절대상태 셋 중 하나가 바로 창세기 1:1입니다.

이 수는 이미 한쪽 편을 들고 있습니다.

“창세기 1:1은 절대상태”라고 세었다는 것은, 세기 전에 이미 그렇게 판정했다는 뜻입니다. 이 도구가 쓰는 자료가 그 판정을 내렸고, 우리 화면도 그대로 보여 줍니다. 갈림길이라고 말하면서 한쪽을 기본값으로 두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서는 그 사실을 적어 두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무엇이 걸려 있나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는 창세기 1:1을 독립된 선언으로 읽는 데 크게 기대 왔습니다. 종속절로 읽으면 1:2의 형태 없는 땅이 창조 이전부터 있던 것이 되고, 이 절은 그 교리를 지지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고 그 교리가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본문과 다른 논거가 있습니다. 다만 이 절 하나로 그 교리를 증명하던 방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문법 하나가 신학 논증의 발판을 흔드는 자리입니다.

더 — 이 도구는 어느 쪽을 쓰나

양쪽을 나란히 둡니다. 절 화면에서 이 자리에 갈림길 카드가 뜨고, 두 읽기와 각각의 근거가 함께 나옵니다. 고르는 것은 읽는 분의 몫입니다.

고른 뒤에는 그 선택이 저장되고, 나중에 다시 왔을 때 예전의 자기 선택과 나란히 볼 수 있습니다.

이 자리의 갈림길 카드창세기 1:1 은 「태초에」인가 「창조하실 때」인가 →

2어순이 뜻을 바꾼다 — 창세기 1:2

히브리어 이야기 문장은 보통 동사가 앞에 옵니다. 한국어와 반대이고 영어와도 다릅니다.

보통 순서 · 동사가 먼저 (창 1:3 등)
וַיֹּאמֶר אֱלֹהִים 바요메르 엘로힘 말씀하셨다 — 하나님이
וַיֹּאמֶר바요메르그리고 그가 말했다 (동사)
אֱלֹהִים엘로힘하나님, 신 (명사)
창세기 1:2 · 명사가 먼저
וְהָאָרֶץ הָיְתָה 베하아레츠 하이타 그리고 그 땅은 — ~이었다
וְ베그리고 (앞에 붙는 조각)
הָאָרֶץ하아레츠그 땅 (명사)
הָיְתָה하이타그것이 ~이었다 (동사)

히브리어에서 이렇게 순서가 뒤집히면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옆으로 빠져서 배경을 설명하는 자리가 됩니다. 영화로 치면 장면이 진행되다 멈추고 카메라가 주변을 훑는 대목입니다.

즉 1:2는 “그다음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가 아니라 “그때 상황은 이랬다”입니다.

무엇이 걸려 있나

배경절이라면, 형태 없는 땅과 깊음과 물은 창조의 결과가 아니라 창조가 시작될 때 이미 있던 것이 됩니다. 1절을 종속절로 읽는 쪽과 맞물립니다.

여기서 고대 근동의 다른 창조 이야기들과의 비교가 열립니다. 그 이야기들에서도 창조는 대개 무에서 무언가를 만드는 일보다 혼돈을 정리하는 일로 그려집니다.

어순 하나로 여기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이 요점이고, 반드시 여기까지 가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자리의 갈림길 카드히브리어의 기본 어순은 동사 먼저인가 주어 먼저인가 →

3“우리가 만들자” — 창세기 1:26

창세기 1:26
נַעֲשֶׂה אָדָם 나아세 아담 우리가 만들자 — 사람을
נַעֲשֶׂה나아세우리가 만들자 (1인칭 복수 권고형)
אָדָם아담사람, 인간 (특정 개인의 이름이 아닙니다)

앞뒤로 하나님은 계속 단수 동사를 받습니다. בָּרָא (바라 · 그가 창조했다), וַיֹּאמֶר (바요메르 · 그가 말했다), וַיַּרְא (바야르 · 그가 보았다) — 전부 단수입니다. 그런데 이 한 자리에서 1인칭 복수가 나옵니다.

그 전에 — “만들자”가 이미 번역입니다

히브리어에는 “~하자”를 뜻하는 권고형이라는 꼴이 따로 있습니다. 낱말 끝에 ָה 가 붙는 것이 표지입니다.

우리가 센 수

창세기 1–12장에서 그 표지를 가진 자리는 손에 꼽을 만큼입니다.
11:3 נִלְבְּנָה 닐베나 · נִשְׂרְפָה 니스레파  ·  11:7 נֵרְדָה 네르다 · נָבְלָה 나벨라  ·  12:2 אֲגַדְּלָה 아가델라  ·  12:3 אֲבָרֲכָה 아바라카

창세기 1:26은 여기에 없습니다.

그러면 1:26은 권고형이 아닌가 —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נַעֲשֶׂה (나아세)의 어근은 עשה (아사 · 만들다)인데, 끝 글자가 이미 ה 입니다. 권고형 표지를 붙일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센 수

모세오경에서 끝이 ה 인 어근의 1인칭 복수 동사가 69번 나오는데,
그중 권고형으로 적힌 것은 0번입니다.

자료가 “권고형이 아니다”라고 판정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어근에서는 형태가 두 꼴을 못 가르고, 못 가를 때 기본값으로 적어 둔 것입니다. 표지가 없다는 사실에서 “권고형이 아니다”를 끌어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가 다 열려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 것이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합니다.
권고형으로 읽으면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누군가에게 제안하는 말이 됩니다.

거의 모든 번역본이 주황으로 옮깁니다. 형태가 정해 주지 않는 자리에서 하나를 고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구에게 제안하는가”라는 물음이 따라옵니다. 아래의 논쟁은 그 물음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러면 그 “누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읽는 방법이 여럿입니다.

읽기내용
신적 회의하늘 궁정의 다른 존재들에게 말하는 것으로 봅니다
위엄의 복수왕이 자기를 복수로 말하는 관용 표현으로 봅니다
자기 권고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로 봅니다
삼위일체후대의 교리를 이 자리에서 읽어 냅니다

마지막 읽기는 본문보다 훨씬 뒤에 형성된 교리를 소급해 넣는 방식이라, 지금 학계에서 본문 근거로는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여전히 널리 설교되기 때문에 적어 둡니다.

무엇이 걸려 있나

이스라엘의 유일신 신앙이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였는가, 형성 과정을 거쳤는가라는 물음입니다. 신적 회의로 읽으면 다른 신적 존재들의 자리가 본문 안에 남아 있는 셈이 됩니다.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본문들이 더 있습니다. 시편 82편에서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 서서 판결하시고, 열왕기상 22장에서는 하늘 군대가 좌우로 둘러선 가운데 논의가 오갑니다.

이 자리의 갈림길 카드「우리가 만들자」는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

4수동인가 재귀인가 — 창세기 12:3

여기서부터는 히브리어 문법이 신약으로 곧장 이어집니다.

창세기 12:3 ·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마지막 구절
וְנִבְרְכוּ בְךָ כֹּל מִשְׁפְּחֹת הָאֲדָמָה 베니브레쿠 베카 콜 미쉬프호트 하아다마 그리고 복을 받을 것이다 — 너로 — 모든 — 족속들이 — 그 땅의
וְנִבְרְכוּ베니브레쿠그리고 그들이 복을 받을 것이다 / 자기를 축복할 것이다 (니팔)
בְךָ베카너로, 너를 통해, 너에 의해
כֹּל콜모든, 전부
מִשְׁפְּחֹת미쉬프호트족속들 (구속상태 — 1장에서 본 그 상태입니다)
הָאֲדָמָה하아다마그 땅, 흙, 경작지

넷째 낱말 מִשְׁפְּחֹת (미쉬프호트)가 구속상태입니다. 그래서 “모든 족속”이 아니라 “땅의 모든 족속”이 됩니다. 1장에서 본 문법이 여기서 그대로 작동합니다.

문제는 첫 동사 נִבְרְכוּ (니브레쿠)입니다. 이 동사는 「니팔」이라는 어간인데, 니팔은 수동으로도 재귀로도 읽힙니다.

두 가지 읽기
수동으로 읽으면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복이 흘러가는 통로가 됩니다.
재귀로 읽으면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써 자기를 축복할 것이다”

복을 빌 때 아브라함의 이름을 예로 든다는 뜻이 됩니다.

주황은 “네가 아브라함처럼 되기를”이라고 말하는 관용 표현입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통로라는 뜻은 여기에 없습니다.

무엇이 걸려 있나

바울이 갈라디아서 3:8에서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그리고 수동으로 읽습니다 — 이방인이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받는다는 논증의 발판으로 씁니다. 바울이 읽은 것은 히브리어가 아니라 그리스어 번역본이었고, 그 번역본은 이미 수동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갈리는 것은 히브리어 문법만이 아닙니다. 번역이 해석을 낳고, 그 해석 위에 신약의 논증이 세워지는 과정이 한 낱말 안에 들어 있습니다.

더 — 창세기 안에서도 어간이 갈립니다

같은 약속이 창세기 안에서 다섯 번 되풀이되는데, 어간이 매번 같지 않습니다.

니팔 — 창 12:3 · 18:18 · 28:14
히트파엘 — 창 22:18 · 26:4

히트파엘은 재귀가 분명한 어간입니다. 니팔처럼 양쪽으로 읽히지 않습니다. 그러니 같은 약속의 절반은 재귀로 적혀 있는 셈입니다. 이 차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다시 갈림길입니다.

이 자리의 갈림길 카드니팔은 수동인가 재귀인가 — 창 12:3 →

5문법책이 틀린 경우 — 피엘

히브리어 동사는 일곱 개의 「어간」으로 변합니다. 그중 피엘을 오랫동안 「강조형」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한국어 문법서 상당수가 아직 그렇게 적습니다.

「강조형」이라면 שָׁבַר (샤바르 · 부수다)의 피엘은 “세게 부수다”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산산조각 내다”에 가깝습니다. 세기가 아니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이 도구는 「강조형」이라고 적지 않습니다. 세어 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센 수

창세기 1–12장의 피엘 45건 중, 「강조」로 읽어야 뜻이 통하는 것 — 0건

피엘은 강조하는 대신 대체로 동작을 만들어 내거나, 여러 번 하거나, 어떤 상태로 만드는 쪽입니다. 그래서 이 도구는 어간에 뜻풀이를 붙이지 않습니다. 붙이는 순간 실제 본문과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걸려 있나

이건 문법 하나를 넘어섭니다. 20세기 중반에 「히브리적 사고는 역동적이고 그리스적 사고는 정태적이다」라는 주장이 크게 유행했습니다. 히브리어 문법의 특징에서 히브리인의 사고방식을 끌어내는 방식이었고, 설교와 신학 교육에 깊이 스몄습니다.

이 방식은 이후 언어학 쪽에서 강하게 비판받았습니다. 핵심은 이것이었습니다 — 한 언어의 문법에서 그 언어 사용자의 사고방식을 끌어내는 논증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피엘은 강조형」도 같은 계열의 잔재입니다.

그러니 문법을 배운다는 것은 문법책을 외우는 일과 다릅니다. 문법책이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적었는지 물을 수 있게 되는 일입니다.

이 자리의 갈림길 카드피엘은 「강조」인가 →

6문법은 답을 주지 않는다

지금까지 다섯을 봤습니다.

자리히브리어문법걸린 물음
창 1:1בְּרֵאשִׁית 베레쉬트구속상태무로부터의 창조
창 1:2וְהָאָרֶץ 베하아레츠어순혼돈이 먼저 있었나
창 1:26נַעֲשֶׂה 나아세1인칭 복수유일신 신앙의 형성
창 12:3וְנִבְרְכוּ 베니브레쿠니팔바울의 인용이 어느 쪽인가
곳곳—피엘문법에서 사고방식을 끌어낼 수 있나

창세기 1장 안에서만 셋입니다. 1–12장에는 더 있습니다. 이 도구가 지금 정리해 둔 갈림길이 열다섯 개입니다.

이 글이 하려는 말은 「히브리어를 배우면 성경을 바르게 알 수 있다」가 아닙니다. 위 다섯 중 어느 것도 문법으로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문법을 아는 사람들끼리도 여전히 갈립니다.

문법이 하는 일은 다른 것입니다.

문법을 모르면 번역본에 적힌 결론을 받습니다.
문법을 알면 결론이 갈리는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번역본은 반드시 하나를 골라 적습니다. 고르지 않고는 문장을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고름의 흔적은 번역본에 남지 않습니다. 완성된 문장만 남습니다.

문법을 알면 그 자리가 보입니다. 그것이 전부이고,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같은 일이 네 층에서 되풀이됩니다

위 다섯은 문법에서 갈리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같은 모양이 본문이 전해진 길에서도 층마다 되풀이됩니다.

층표시가 있는 것표시가 없는 것
글자—58 — 자음만으로는 안 갈리는 자리
전승3 — 서기관이 「이렇게 읽으라」고 적어 둠—
사본8 — 자료가 본문 유형을 표시—
문법—10 — 자료가 표시 없이 한쪽을 적음

그리고 문법 층에서 갈린다고 알려진 것 가운데도 지금은 그대로 쓰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이름이 엘로힘에서 야웨로 바뀌니까 자료가 다르다」는 설명이 오래 쓰였는데, 이 분야의 최근 연구서는 그 논증을 그대로 쓰지 않고 오히려 반박합니다 — 이름이 바뀌는 자리를 자료의 이음매가 아니라 이야기의 배치로 읽습니다. ⚠ 그런데 이 도구의 문체 지도는 여전히 그 옛 구분으로 본문을 갈라 수를 보여 줍니다. 흔들리는 자리에 적어 두었습니다.

어느 층에서나 표시된 것은 적고 표시 없는 것은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것은 대개 표시된 쪽입니다 — 표시가 있어서 압니다. 그러니 「갈리는 자리는 몇 곳뿐」이라는 말은 표시의 수를 갈림의 수로 착각한 것일 수 있습니다.

7이 도구도 이미 골랐습니다

화면을 만들려면 골라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 도구도 중립이 아닙니다.

항목고른 것
발음현대 이스라엘식으로 읽습니다 — 이 글의 음역도 그렇습니다
어간뜻풀이를 붙이지 않습니다 (5장의 이유)
흐름 그래픽기본값이 「형태만」입니다. 담화 갈래는 눌러야 나옵니다
연대본문이 언제 쓰였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점모음 점을 형태 표지로 씁니다

고른 것을 밝히는 편이 안 고른 척하는 것보다 낫다고 봅니다. 각각을 왜 그렇게 골랐는지, 그리고 음역에도 고름이 들어 있다는 것은 왜 문법책마다 다르게 적혀 있는가에 따로 적어 두었습니다.

8어디서부터

이 도구의 목표는 창세기 1–12장을 자기 말로 옮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문법도 갈림길도 그것을 위한 재료입니다. 다 배운 뒤에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옮기면서 필요한 것을 가져다 쓰시면 됩니다.

9이어서 읽을 것